진짜 자기와 가짜 자기, 나로서 살아가기
· 이승혜 센터장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관계를 맺습니다. 가족의 기대에 맞추기도 하고, 배우자의 마음을 살피기도 하며, 직장에서는 다른 사람의 평가를 의식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관계에 맞추는 것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다른 사람의 생각과 기대가 너무 중요해져서 정작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어려워진다면 어떨까요?
“싫다고 말하면 상대가 서운해할 것 같아요.”
“사실 저는 다르게 생각하지만, 그냥 맞춰주는 게 편해요.”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가족치료자 머레이 보웬(Murray Bowen)은 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개념으로 ‘진짜 자기(solid self)’와 ‘가짜 자기(pseudo-self)’를 이야기했습니다.
■ 다른 사람의 반응에 따라 달라지는 나
가짜 자기라는 말을 들으면 가식적이거나 거짓된 모습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보웬이 말하는 가짜 자기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가짜 자기는 자신의 분명한 신념과 가치에 기반하기보다 관계에서 느끼는 불안과 주변의 압력에 영향을 받아 형성되는 자기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입니다.
부모님이 실망할까 봐 내가 원하는 선택을 포기합니다.
배우자가 화를 낼까 봐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좋지 않게 평가할까 봐 원하지 않는 부탁도 거절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상대방이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워 계속 설득하거나 내 생각을 따르도록 요구하기도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다르지만 그 중심에는 비슷한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보다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가 더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진짜 자기란 무엇일까요?
진짜 자기는 자신의 생각과 가치, 신념을 비교적 분명하게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자기의 모습을 말합니다. 즉, 자신의 입장을 갖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당신의 생각은 이해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당신이 서운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번에는 이렇게 선택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짜 자기가 고집이 세거나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입장이 분명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생각이 다르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상대의 의견을 충분히 들을 수 있고, 새로운 정보가 있다면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차이는 ‘생각을 바꾸느냐, 바꾸지 않느냐’가 아닙니다.
관계의 불안과 압력 때문에 바꾸는가, 충분히 생각하고 스스로 선택해서 바꾸는가에 있습니다.
■ 관계가 중요할수록 나를 잃기 쉽습니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보다 사랑하고 가까운 사람 앞에서 더 쉽게 흔들립니다.
부모의 한마디에 하루 종일 마음이 무겁기도 하고, 배우자의 표정이 좋지 않으면 ‘내가 뭘 잘못했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가까운 사람이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으면 단순히 ‘생각이 다르다’고 받아들이기보다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관계가 불안해 질수록 우리는 두 가지 방향으로 움직이기 쉽습니다. 상대에게 맞추며 나를 포기하거나, 반대로 상대가 내 생각에 맞추도록 만들려고 합니다.
두 모습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보웬의 관점에서는 모두 관계의 정서적 압력에 내가 얼마나 영향을 받고 있는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 ‘나답게 산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분화에 대해 이야기하면 때때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라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보웬이 이야기하는 분화는 관계에서 벗어나 혼자 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과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나의 생각과 감정을 잃지 않는 능력'에 가깝습니다.
부모를 사랑하면서도 부모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고,
배우자의 서운함을 이해하면서도 나의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으며,
상대방과 의견이 다르더라도 관계가 무너질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관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와 함께 있으면서도 ‘나’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 나는 얼마나 나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때로는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중요한 선택을 할 때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상대방이 실망하거나 반대하더라도 내 생각을 차분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의 감정과 나의 감정을 구분할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싶은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선택은 불안을 피하기 위한 것인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에 따른 것인가?’
이 질문에 언제나 분명하게 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진짜 자기와 가짜 자기의 모습이 함께 있고, 가까운 관계에서는 누구나 흔들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순간에도 다시 나의 생각과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는 힘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 관계 속에서도 나로서 존재하기
상담에서도 때로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하지만 상담의 중요한 역할은 상담자가 대신 정답을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담자가 관계의 기대와 불안 속에서 미처 듣지 못했던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알아가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어떤 관계를 원하는지 조금씩 분명해질수록 다른 사람의 반응에 끌려가기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역설적으로 내가 나로 설 수 있을 때 상대방도 그 사람답게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서로에게 맞추느라 자신을 잃는 관계도, 나를 지키기 위해 상대를 밀어내는 관계도 아닌,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각자가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관계.
비:마인드는 그 힘을 함께 찾아가는 상담을 지향합니다.
나로서 존재하는 곳, 비:마인드 심리상담센터